혁명일화

김일성주석과 수카르노

수카르노의 딸 라흐마와띠 수카르노뿌뜨리는 자기의 회상록에서 나의 아버지 수카르노는 20세기가 낳은 세계적위인이신 조선의 김일성주석을 존경하였다고 썼다.

식민주의자들의 통치로부터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쟁취한 후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가 나아갈 진로를 모색하는 과정에 김일성주석(1912년-1994년)에 대해 알게 되였다. 그이께서는 자주시대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을 창시하시고 동방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국가를 일떠세우시였으며 강대한 두 제국주의를 타승하시였다. 령토와 인구수는 크지 않아도 그 어떤 정치, 경제적예속도 없는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해나가고계시였다.

1963년 11월 수카르노대통령의 발기로 인도네시아에서 진행된 제1차 가네포(발전도상나라들의 경기대회)는 김일성주석과 수카르노사이의 친분관계를 두텁게하고 조선과 인도네시아 두 나라사이의 친선관계에서 전환을 마련한 계기점으로 되였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인민들과의 친선단결을 강화하고 제국주의자들을 반대하는 공동의 투쟁에서 가네포가 차지하는 지위와 중요성을 헤아려보시고 그 준비사업에 로고를 바쳐가신 주석께서는 가네포개막을 앞두고 수카르노에게 친절한 축전도 보내주시였다.

수카르노대통령은 1964년 11월 조선을 방문하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몸소 비행장에 나오시여 그를 따뜻이 맞아주시였다.

회담에서 그이께서는 반제반식민주의, 쁠럭불가담운동이 나아갈 길을 환히 밝혀주시였으며 반제자주력량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함께 손잡고나가자고 하시였다.

조선방문기간 주석의 령도하에 개화발전하는 이 나라의 현실과 자력갱생의 정신으로 경제분야에서 이룩한 성과들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도 자립경제에로 방향전환하여야 한다는데 대하여 인식하게 되였다.

그는 자기를 오랜 벗처럼 대해주시는 김일성주석께 끝없이 매혹되였으며 그이의 인도네시아방문을 진심으로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주석의 인도네시아방문이 이루어지게 되였다.

그런데 반둥회의 10돐기념행사를 계기로 한 그이의 인도네시아방문이 결정된 당시 김일성주석께서는 몸이 불편하시여 먼길을 떠나실 형편이 못되시였다고 한다. 동남아시아의 복잡한 정세로 인한 일군들의 만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이께서는 수카르노대통령이 나를 초청해놓고 기다리다 못해 먼저 찾아오기까지 했는데 미룬다는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기어이 인도네시아방문의 길에 오르시였다.

1965년 4월 김일성주석의 인도네시아방문기간 수카르노대통령의 성의는 전례를 초월하는것이였다.

그는 자기가 직접 호위안전사업을 책임지고 그이를 최고의 국빈으로 모시였으며 성대한 환영의식들을 진행해나갔다. 그 어느 외국수반도 참가하지 못한 인도네시아림시인민협상회의에 그이를 초청하였다. 그이께 인도네시아의 최고훈장인 인도네시아공화국훈장 제1급을 수여해드리도록 하였다. 주석께 백수십년의 력사를 가진 보고르식물원에서 수십년간 연구하여 육종해낸 진귀한 란초꽃을 보여드리고 이 꽃을 김일성화라고 부르려고 한다고 말씀드리였다.

1965년 10월 인도네시아에서는 정치적동란이 발생하여 수카르노는 실권을 잃고 연금상태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이전날의 측근들과 친우들도 그를 외면하였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그와의 인연과 의리를 버리지 않으시였다.

주석께서는 1968년 8월 인도네시아주재 조선대사가 그를 위문방문하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1970년 그가 악화된 병세로 병원에 입원하여 생의 마감시기를 보내고있을 때에도 조선대사를 보내시여 진심으로 그를 위로하도록 하시였다.

수카르노는 주석과의 상봉과 친분관계에 대해 돌이켜보면서 그분이시야말로 가장 위대하고 탁월하고 인정미가 넘치는분이시며 그분과 같은 위인은 세상에 없다고 자기의 진정을 토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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